무엇을 좋아하느냐는 것이 때때로 우리 인생의 모습을 결정짓곤 한다. 축구가 아니라 야구, 커피 대신 코코아, 여름보단 겨울, 자전거를 탈 시간에 소설책 한 권. 그런 것들은 내가 속한 삶의 풍경을 바꾸곤 한다. 시간이 남은 어느 휴일에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좋은 플레이리스트를 가진 번화가의 펍에서 맥주를 한 잔씩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강공원의 벤치에 홀로 앉아 강바람을 맞으며 어젯밤 내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음악들을 듣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합당한 풍경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월 플라워>의 찰리 역시 무언가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지만, 그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풍경에 속해 있다. 그가 좋아한 것은 불행히도 ‘책’이었고, 파티와 연애,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왕따 취급을 받으며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다. 과거에 그와 친했던 친구들은 그를 모른 척하고, 동급생들은 책을 뺏어 찢어버리며, 심지어 친누나마저도 상급생 핑계를 대며 식당에서도 자리를 피한다. 찰리는 자신이 속한 그 풍경을 어서 벗어나기 위한 카운트를 한다. 앞으로 1,384일.
<월플라워> 스틸컷 ⓒ네이버영화
동심원의 가장자리에 걸려 있는 사람들
단지 취향이나 성격으로 인해 찰리에게 주어지는 그 풍경은 유달리 가혹해 보인다. 그것은 찰리가 속해 있는 ‘교실’이라는 공간이 특별한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성적에 따른 구분은 물론이거니와,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면 아이들 사이에선 더욱 위력 있는 또 다른 질서가 영향력을 발휘한다. 수업과 수업 사이, 식사하는 시간, 등교와 하교 시간, 화장실에서 머무는 그 이면의 시간들에는, 성적 이외에도 남성성, 외모, 재력, 사교성 등을 기준으로 다양한 위계질서들이 생겨난다. 그러한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고, 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멀리 가면 갈수록 그 질서에 어울리지 못하는 주변인들이 생기게 된다.
위계를 세우고 주변인을 발생시키는 이 교실의 시스템을 가장 정직하게 닮은 것은 바로 파티다. 파티의 중앙은 언제나 가장 춤을 적극적으로 잘 추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차지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조명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찰리의 몫은 아니다. 비록 그가 구원처럼 나타난 이복남매, 패트릭과 샘에 의해 용기를 내어 중앙으로 한 발짝 다가가 그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취기를 빌려 엉뚱한 소리를 하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을 잠깐이나마 끌기도 하지만, 발버둥쳐야 빛 속에서 잠깐 머물 수 있는 그 공간은 여전히 찰리가 온전히 속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패트릭은 찰리에게 놀리는 건지 인정하는 건지 모를 말투로 말한다.
“넌 월플라워(파티에서 병풍처럼 벽에 붙어만 있는 사람)야.”
그런 찰리에게도 친구들이 생긴다. 동성애자 패트릭과 뒷소문이 많은 샘, 불교를 믿는 메리와 청바지를 훔치는 앨리스. 그들도 역시 패트릭이 과제로 만든 삐뚤어진 시계처럼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배척받으며 겉돌고 있지만, 그들이 머물고 있는 풍경에는 소외된 주변인으로서의 우울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도서관이라는 근사한 은신처
그들이 메리의 잡지 제작을 도와주기 위해, 그리고 공부를 하기 위해 모였던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도서관이 파티나 교실과 다른 점은 곳곳에 서가가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서가와 서가 사이, 좁고 아늑한 그 공간에는 경쟁해야 할 상대도, 목표로 삼아야 할 골도 없다. 대신 앞뒤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에 맞는, 수많은 책들이다. 그 취향이 설령 다수가 정해놓은 ‘좋아해야 할 것’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인으로 도태되거나 하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단지 내가 있는 코너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눈치 보지 않고 앉아서 진득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뜻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도서관이야말로 겨우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도, 가장 손쉽게 내가 머물 풍경을 직접 고를 수 있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남몰래 사랑을 나누는 동성 연인 패트릭과 브래드가 서가와 서가 사이를 지나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 그 모습에서 비밀연애의 서스펜스가 느껴지기보다 안온함이 느껴지는 이유 역시 바로 그 서가들 덕분이다. 도서관에는 주인공이 없다.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위계질서 시스템의 영향력은 촘촘하게 세워진 서가들로 인해 분산되어 의미 없는 파동으로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유일한 질서는 오직 ‘나’이며, 나의 취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 앞의 서가에 가득 꽂힌 그 책들이 증명해준다. 세계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며, 조금만 발품을 팔아 서가를 옮겨 다닌다면 그것을 틀림없이 찾을 수 있다는 위로와 확신이 그곳엔 있다.
<월플라워> 스틸컷 ⓒ네이버영화
내가 덮은 책이 너의 첫 페이지가 되어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나의 취향은 그저 내가 선택한 그 서가와 서가 사이, 좁은 공간에서 어디로도 나가지 못한 채 메아리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너는 불교 신자고, 나는 드래그 퀸이니,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각자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영화는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마다의 취향과 상처를 갖고 모인 찰리와 친구들은 그저 서로를 존중하기만 하는 방관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위로와 갈등의 중심에는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할까?’라는. 그 질문은 단순히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를 다른 존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내가 지금 네게 건네고 있는 이것이, 찰리의 표현에 따르면 나 자신의 ‘일부’니까.
때문에 크리스마스 날 찰리와 친구들이 서로의 비밀 산타가 되어 선물을 교환하는 장면은 어쩌면 영화 내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한다. 선물 받은 물건들을 보고 선물한 사람을 추측하는 게임은, 선물이 그 사람의 일부일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나의 일부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될까. 앤더슨 선생님이 주신 책 《월든》을 그저 ‘지루한 호수’라고 말하며 던져버린 메리처럼, 불쑥 저지른 패트릭의 키스가 찰리에게 그저 역겨운 것으로 치부되어버린다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의 막바지에 떠나는 샘에게 찰리가 선물로 건네는 책들은 무척이나 위험한 선물이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 있을까. 자신의 걸음이 멈추었던 서가 앞으로 다른 이를 초대한다는 것은, 기껏 머물 수 있게 된 자신의 풍경과 상대방의 풍경까지 모두 깨뜨려버리는 일은 아닐까. 앤드루 선생님께 받았던 책들이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찰리에게 구원이 되었던 것처럼, 그 책들이 샘에게도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이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은 오히려 그 책이 찰리와 샘에게 같은 의미로 와 닿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 책들이 찰리의 손을 떠나 샘에게 주어지는 순간, 그것들은 새로운 풍경에 속하게 될 것이다. 샘은 책을 볼 때마다 방과 후 학생들이 모두 떠난 빈 교실에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앤드루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렀고 이제는 떠나야 하는 그 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준 찰리와 오랫동안 나눈 키스를 떠올리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샘은 찰리와는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 그 책들을 펼쳐 읽으며 자신이 간직한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좁지만 한 사람이 편하게 앉아 느긋하게 책을 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은 있는, 자신만의 서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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