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밤의 도서관》(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세종서적, 2019)
집을 정리하는 데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 중 하나는, 반드시 손에 잘 닿는 곳에 자주 쓰는 물건들을 놓아두는 ‘잡동사니’용 선반 내지는 서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 안에 있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모두 용도에 따라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게 최상이겠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물건들을 분류하는 데 있어 난점은, 어떤 식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물건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물건이 너무 많은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용도에 따라서, 사용 빈도에 따라서, 사용 장소에 따라서, 디자인에 따라서, 선호도에 따라서, 기타 등등······모든 것을 너무 엄격하게 분류하려고 들면 결국 물건 하나에 서랍 하나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전혀 분류가 아니라는 깨달음에 - 도달하게 된다. 잡동사니용 선반은 이런 분류 불가능성에 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것이다.
낮과는 어딘가 다른 작고 무수한 질서들
집 안의 간단한 물건들을 정리하는 데도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책들을 제대로 분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우리는 도서관에 대한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를 알게 된다. 도서관은 바로 이 불가능한 과업을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밤의 도서관》을 쓴 알베르토 망구엘은 ‘도서관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정리되고 우아하게 보관되는 절제된 공간이지만, 어떻게 정리하고 분류하더라도, 또한 아무리 정밀하게 설계하더라도 완벽하게 아우를 수 없는 곳’(168쪽)이라고 말한다.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분류가 단순히 분류가 아니며,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분류하는가는 어떻게 읽는가에 영향을 미치며, ‘책을 분류하는 주제나 표목이 책의 성격을 바꿔놓기도’(52쪽)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안톤 체호프의 《이상한 자백》을 추리소설로 분류하면 독자는 살인과 단서와 속임수에 초점을 맞추어 이 소설을 읽기 마련’(53쪽)이다. 그러므로 분류는 단순히 기계적인 일이 아니며, 또 사소한 일도 아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가진 복잡성은 이처럼 분류라는 행위가 품고 있는 내밀한 모순으로부터 자라난다. 엄청난 독서가이자 장서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도서관의 이 모호하고 복잡한 특성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킨다. 제목인 ‘밤의 도서관’은 공적인 분류 체계와 질서정연함을 연상시키는 낮의 도서관과 대구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하여 밤의 도서관이 꼭 무질서와 혼란을 대표하는 장소인 것만은 아니다. 낮의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질서를 위한 분투가 없다면, 밤의 도서관 또한 없을 것이다. 밤의 도서관이 드러내는 것은 무질서라기보다는 질서의 휴식, 질서의 빈틈, 그리고 낮과는 어딘가 다른 작고 무수한 질서들이다.
미지의 독자를 위한 사랑
그렇기에 《밤의 도서관》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하겠다는 불가능하지만 야심찬 열정에 대한 존중이 있으며, 이 열정이 책에 대한 사랑과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또 얼마나 따로 분류하기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명백한 자각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은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생각하는 것도 제각각이지만 저자인 알베르토 망구엘까지 포함해 그 모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같은 카테고리로 묶인다.
《밤의 도서관》에서 나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겼던 것은 바로 이 사랑이었다. 들끓고, 맹목적이고, 때로 엇나가는 사랑들. 작가들은 종종 도서관과 사서들을 비난하고는 하는데,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책이란 원래 딱 떨어지게 분류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억지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분류하려는 행위가 꼭 그것을 가두고 한정짓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책의 경우에 분류는 곧 분배의 준비고,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부터 연원했다는 점에서 사랑의 형식이기도 하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책이 어떻게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있을까? 분류가 책을 특정한 위치에 종속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종속은 역설적으로 그 책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와 관련해 이러한 역설과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글쓰기는 그 이전의 관례들의 기억으로 여전히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결코 무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낱말들은 새로운 의미들 가운데 신비하게 연장되는 이차적 기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나는 타인의 언어나 심지어 나 자신의 언어에 점차로 사로잡히지 않고는 지속적으로 이 자유를 펼쳐낼 수 없다.’
- 《글쓰기의 영도》,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21쪽.
글쓰기를 이루는 재료인 단어는 결코 의미 안에 갇히지 않고 ‘신비하게 연장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일단 그러한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글쓰기의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 책을 분류하는 완전한 기준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우리가 기어코 그것을 분류하고자 하는 이유는 결국 책장의 어딘가에 그 책을 꽂아놓기 위해서다. 누군가 때때로 그 책들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고, 또 꺼내들 수 있도록. 그러니 도서관의 사서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책을 보러 올 미지의 독자를 위한 사랑.
2020년 9월에 알베르토 망구엘은 자신의 도서들을 포르투갈 리스본의 독서 역사 연구 센터에 기증했다. 그 전까지, 알베르토 망구엘이 ‘밤의 도서관’이라고 불렀던 건물은 엄밀히 말해 서고였고, 공공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기에 도서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가 자신의 서고를 도서관이라고 불러봤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둘러싸고 서 있던 작은 방의 책장들, 어린 눈에는 정말 많아 보였지만 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책들, 이사를 다니면서 상처가 나고 망가지고 빛이 바랜 그 책들에게로 나를 데려간다. 이제 나는 기억 속의 그 방을 나의 도서관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세계의 수많은 도서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또 알베르토 망구엘의 도서관과도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사랑 속에 함께 묶여 있는 공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스토리' 코너에서는 에세이스트 김나리가 도서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발랄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해질 무렵 오거리에서 정장을 멋있게 입은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도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모두 약속하지 않은 우연한 자리였다. 그는 어느 장소에서든 정갈하게 정장을 갖춰 입었다.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입고도 그다지 불편한 기색
네이버 트레이드마크인 녹색 검색창을 만든 사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건강한 가정식 식당 일호식을 연 사람, 광고 없이 100퍼센트 판매수익에 의존하는 월간지 《B》를 창간한 사람, 영종도에 있는 네스트호텔의 다지인을 총괄한 사람, 카카오 브랜드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되고 카카오 공동대표이사가 된 사람. 모두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조수용 한 사람을 수식하
10년의 인연과 《책은 죽지 않는다》의 첫 출발이시바시 다케후미 씨가 책이 나왔다며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오랜만에 만난 그는 머리를 산뜻하게 잘라 한결 시원한 인상이었다. 이시바시 씨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섬세함은 글에만 있지 않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다. 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오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