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보꼬는 책을 좋아했다. 내가 방바닥에 엎어놓거나 펼쳐놓은 책들. 마치 끌어안고 있다가 잠결에 놓친 것처럼 앞다리를 책 표지에 나른히 늘어뜨리고, 머리통을 책등에 얹고. 펼쳐진 책에서는 그 위에 제 몸을 최대 면적으로 펼쳐 엎드려 새근새근 잤다. 나는 건성으로 “미안!” 하며 보꼬가 깔고 있는 책을 서슴없이 빼내곤 했다. 다른 책을 읽어도 됐으련만. 보꼬, 정말 미안!
그러고 보니, 란아도 명랑이도 책을 깔고 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여기저기 쌓인 책 무더기 사이에 흩어져 있는 책들 위에서였다. 보꼬는 내가 읽다가 둔 책을 콕 찍어 몸을 포갰다. 보꼬, 너 그런 녀석이었구나. 안기는 거, 셋 중에서 제일 싫어했는데, 그랬구나. 보꼬한테 내가 읽던 책은 나였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리고 네 눈에는 내가 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겠지. 새벽에 파김치가 돼 들어와서, 너는 보는 둥 마는 둥하고, 그랬었다. 아, 그 시간을 조금만 떼어 너를 보듬고 눈을 맞췄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아가 간 뒤 4년여, 그 긴 시간. 네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2.
오늘자 신문의 별지, ‘금요 섹션’이 싱크대 앞에 떨어져 있다. 그걸 주워들고, 마저 버리려고 폐지 모으는 상자로 발을 옮기며 대충 훑어보는데, 응? ‘책 없는 거리 만들기’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잘못 읽었나? 다시 펼쳐보니, 과연 잘못 읽었다. ‘차 없는 거리 만들기 참여자 모집’이었다.
몇 번인가, 책을 잠깐 잃은 적이 있다. ATM 기계 위, 골목 안 오토바이의 안장, 식당과 찻집 등등에 읽던 책을 깜빡 잊고 두고 왔는데, 다시 구하면 되지만 당장 이어 읽고 싶기 때문에 종종걸음으로 되돌아갔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책이 없어지지 않았다. 척 봐도 읽음직스러운 책도 누구 한 사람 유혹하지 못했다. 우리 민도가 높다는 증표일 뿐일까? 그럴지도.
ⓒTHE LIVERARY
3.
두어 달 전, 혜화동 ‘동양서림’에서 눕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다가 고른 게 《투명한 힘》이다. 내용을 살피고 싶었지만 비닐에 싸여 있었다. 동양서림 2층에 있는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에 올라가니 주인장 유희경이 내 손에 들린 《투명한 힘》을 보고, “이 책 굉장히 좋아요”라고 했다. “아, 읽은 책이야?” “예, 래핑할 만한 책이에요.” 흠, 잘 골랐군.
책을 읽다가 문득 띠지를 보니 ‘시인을 위한 책’인가, ‘시인들을 열광시킨 책’? 그 비슷한 홍보 글이 적혀 있어서 나중에(바로 지금) 옮기려고 잘 뒀는데, 암만 찾아도 없다.
‘이 책은 움직이는 힘들이 숱한 장면과 주체에, 마주침에, 또는 가로막힌 기회에, 또는 이미 만들어진 환경의 평범성 안에 어떻게 내재하는가를 다룬다.’ 책의 맨 뒤 챕터 ‘시작’에서 옮겼다. 저자 캐슬린 스튜어트는 문화인류학자다. 미국 시민사회 일원인 저자가 학자의 머리와 시인의 가슴으로 사람, 사건, 상황, 사물 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기록한 단상들이 책에 실려 있다(《투명한 힘》을 래핑해서 출시한 것은 글들이 짤막짤막해서, 선 자리에서 완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듯).
‘9.11 테러 때 여자는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모든 것이 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가 보기에는 그보다는 무언가 오랫동안 쌓여온 것이 자리를 딱 잡은 듯했다. 일상에 미친 충격이 전혀 새로운 것 같지 않았다. 잠을 자다 느닷없이 깨었지만, 이미 자다 깨다 하던 참이었다고 할까’(‘가만히 지켜보기’에서)같이 내 생각을 정리해 견해라는 걸 정립해주는 글들도 좋고, ‘몇 년 후에 오스틴에 사는 친구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옆집에 웬 이상한 남자가 사는데, 같이 살던 여자가 떠난 후에 혼자 살고 있다는 것. 그가 캄캄한 집 안에서 맥주 캔을 벽에 던지고 번쩍거리는 텔레비전의 푸른 불빛을 향해서 영 엉뚱한 장면에서 웃는다는 얘기였다’(‘푸른 TV의 밤들’에서)같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뿌옇고 엷은 ‘주체’들의 삶의 행태를 너무도 잘 알겠는, 페이소스가 확 몰려오는 글들도 좋다.
저자는 동시대인의 참담한 삶의 진경을 서술할 때도 참으로 담담하다. 어디를 펼쳐도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투명한 힘》은 인류학 에세이인 것이다. 그는 진단도 처방도 하지 않는다. 심리나 취향에 대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 현상과 상태를 기록할 뿐. 인류학자의 자세로 쓴 글인데, 건조하지 않고, 엷은 습기가 번지는 듯 부드럽다. 리포트의 탈을 쓴 문학이랄까, 문학의 탈을 쓴 리포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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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어떤 책이라도 고양이와 엮을 수 있겠지만, 《투명한 힘》을 택한 데 빌미가 된 건 한 챕터에 흘깃 담긴 ‘세상에 이런 일이’다.
키우는 고양이 수십 마리를 집 안에 가둔 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긴 여행을 떠난 여자가 있는데,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부르주아 여성이라고.
미국에도 애니멀 호더가 있겠지. 그러니까 ‘애니멀 호더’라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겠지. 외국인은, 게다가 선진으로 여겨온 서양 사람은 동물 혐오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 내 편견이 몇 해 전에 깨졌다.
시인 조은이 내 고양이밥 셔틀을 도우러 온 날이었다. 갈월동의 한 트럭 옆에 쪼그려 앉아 고양이밥을 챙기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지금 고양이 밥 주는 거예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고양이 밥을 주고 있을 때 누가 멈춰 서서 구경하거나 말 시키는 걸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선의에 찬 미소를 띤 아가씨한테도 무뚝뚝하고 사나운 얼굴로 대해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띤 백인 아저씨이니, 외국인에 대한 예의로 마주 미소 지으며 “예”라고 했다. 그런데, 뭔가 가벼운 덕담을 건네리라고 우리가 예상했던 이놈(^^)이 찌푸린 인상으로 돌변하며 “고양이 밥 주지 마요! 왜 고양이 밥을 줘요?”라는 게 아닌가? 설마? 조은과 나는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우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섰다. “왜요?” “왜 고양이 밥을 줘요?” 그는 ‘왜’에 ‘왜’로 답했다. 우리말에 그 정도로 능숙하니 여기서 오래 산 선교사인가? 그렇다면 더욱이 신앙인이 그렇게 냉혹할 수가! 고양이 밥을 주기 시작한 이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한민국 남자 노인의 행태, 딱 그대로였다. 분노와 미움이 솟구쳤다. 급기야 조은이 당차게 그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왜 남의 나라에 와서 고양이 밥을 주라 마라 하세요?” 오, 역시 조은! 나는 그런 말 나중에나 생각났을 거야. 당신은 이런 말 듣고 기분 나빠져도 싸! 그 역시 우리를 노려보며 “우리 옆집 할머니가 고양이 때문에 힘들어 해요! 고양이 밥 주지 마세요!” 호령한 뒤 제 갈 길을 갔다. 우리도 치사한 말을 했지만, 그 외국인도 우리한테 인종 우월의식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남의 나라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한테 꼰대처럼 굴까?
5.
‘일상이 지닌 모호함 또는 미완의 성질은 하나의 자원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이미 일어났고 고정 불변인 것들이 그렇게 많아 보이는데도 여전히 움직이는 무수한 내재적 힘들이 자욱하니 말이다. / 이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성취되어야 할 도전이거나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 아니라 감응의 어떤 상태,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상태이다’(‘일상의 모호함’에서).
《투명한 힘》은 나, 시인1에게 영양가 많고 맛 좋은, 아보카도와 치즈와 양상추와 토마토를 듬뿍 얹은 또띠야 같은 책이다.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리가 쓰는 시라는 게 문화인류학의 예술 아닌가, 생각해본다. 시인은 문화인류학자.
황인숙_시인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있다. 최근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를 펴냈다.
현대문학상(2017), 김수영문학상(2004), 동서문학상(1999)을 수상했다.
1. 두어 해 전 일이다. 마을버스 정류장 옆 전신주에 고양이 주인을 찾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스코티시폴드(Scottish Fold)를 보호하고 있다며 연락처를 남겨놓았다. 노르스름한 빛깔의 귀 접힌 고양이가 찍힌 흐릿한 사진과 함께. 그 고양이가 곧 제 집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즈음 우리 집 아래 골목의 고양이 밥 놓는 데 못 보던
1. 내가 사는 동네에 아주 작은 공원이 있다. 골목의 서른 개쯤 되는 계단을 올라가 딸랑 그네 네 개가 있을 뿐인 놀이터로 접어들면, 근처 어느 집의 열린 대문 안이나 화단 덤불에서 서성이던 ‘귀(貴)’가 카트 바퀴 구르는 소리를 듣고 울면서 쫓아와 맞아준다. 하소연하는 듯도 하고 따지는 듯도 한 울음소리다. 귀의 정식 이름은 귀부인. 3년 전엔가, 공
생태도시, 우리가 말해온 이름 뒤에 숨은 의문 올해 초, 팀별로 모여 한 해 활동 계획을 짜던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한 차례 회의를 마치고 선배와 점심을 먹으러 가던 중 선배가 물었습니다. “해민은 생태도시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선배가 6년째, 제가 4년째 몸담고 있는 팀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질문이 새삼스러웠지만, 그날 오전 내내 비슷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