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코너에서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서가 등장하는 소설 등 도서관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 2017)
돌이켜보면 픽션 속에서 도서관이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만 묘사된 적은 아주 드문 것 같다. 물론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픽션이란 우리의 삶의 감각에 ‘조작’을 가하는 것이므로, 어떤 공간의 ‘상투적인’ 역할이 픽션에서 굳이 재현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의 경우는 그 정도가 유별나게 심한 것 같은데, 픽션 속 도서관이란 평범하게는 인물들이 큰 소리로 떠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받는 곳이고, 때로는 어떤 사건의 단서가 숨겨진 공간이며, 로맨틱 혹은 섹슈얼한 긴장이 조용하게 감도는 곳이거나 아니면 아예 그 자체로 역동하는 하나의 세계로 우리에게 제시되곤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럴까? 이 공간에 감도는 정숙함과 부동성의 무드가 아마도 이런 묘사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도서관이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 묘사될 때도 극중에선 아주 잠깐 등장하거나, 인물이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그 공간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지워지곤 하는 건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네 삶 속에서도 도서관이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만 작동하지는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전적으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거장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2017년 작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 New York Public Library)> 때문이다.
제목이 곧 내용으로, 영화는 저 유명한 뉴욕 공립도서관의 (수많은 분관을 아우르는) 이곳저곳을 꼼꼼히 탐색하며 동시대 도서관의 복잡한 생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들려준다. 금방 ‘탐색’이라고 굳이 쓴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서관 이용자’들을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도서관 이용자’라는 집합이 서가에서 책을 펼쳐둔 채로 공부하는 이들만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이 말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사서를 포함한 직원들이 있고, 도서관에서 준비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계 노인들이 있고, 피아니스트가 있고, 강연자와 방청객들이 있고, 몇 차례 회의를 진행하는 운영진이 있고, 점자 읽는 법을 배우는 시각 장애인이 있다. 또한 (이 영화에 대한 많은 리뷰에서 무시되지만) 노숙자들이 있고, 도서관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기 바쁜 관광객들이 있고, 도서관 컴퓨터로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는 사람이 있고, 졸거나 딴짓하거나 아예 무심하게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광범위하고 불균질한 집합. 요컨대 여기선 공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서관으로 인해 호명되며 동시에 도서관을 이루는 거의 모든 이가 ‘도서관 이용자’에 포함되는 것이다. 어째서? 도서관의 공공성으로 인해.
돌이켜보면 도서관은 그 근본에 있어 광의의 교육기관으로 기능해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마음껏 읽고 소장할 수 없다는 잔인한 사실에 맞서, 사람들이 책을 비롯한 기록매체들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하면서 도서관은 대안적 교육기관의 성질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의 탄생 - 문명의 기록과 인간의 역사》라는 책을 따르자면) 지난 한 세기 동안 공공도서관의 발전은 도서관의 이런 ‘대안적’ 성질이 만개해 공공성과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도서관의 역사란 곧 대안적 교육기관의 성질이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변이한 궤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 (영화 안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고 보이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더 많은 책과 책걸상을 구비하는 것만으로는 이상적인 공공성을 추구할 수 없다. 고도로 디지털화된 사회, ‘시민’ 범주의 확장. 이런 정세 속에서 도서관은 무엇을 해야 할까? 또 그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수많은 강연과 회의는 이 질문을 속에 품은 채 진행된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국적, 젠더, 인종, 계급, 학력, 장애 등 서로 다른 바탕 위에 있는 ‘시민’ 각자를 위해 (학교나 구글에서는 할 수 없는!) 가지각색의 교육을 제공하(려 애쓰)는 뉴욕 공립도서관의 면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도서관은 사회에 필수적인 공공 장소/기관의 위상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위상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레 도서관은 공공성의 역설, 정확히는 공공성이라는 낱말의 복합성이라는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공공성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도서관은 교육의 장소면서 교육의 장소가 아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서술을 한번 풀어보자. 공공성은 ‘교양’과 ‘불순’의 의미, 그리고 ‘이념’과 ‘행정’의 성질을 한몸에 품고 있다. 즉, 이 낱말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양’을 제공하고 또 요구하는 일을 의미하는 한편 ‘불순’에 가까운 이들도 엄연한 시민으로 충분히 포괄하는 일을 의미할 수 있고, 또한 추구해야 할 ‘이념’이면서 동시에 수행되는 ‘행정’이기도 하다.
도서관의 경우라면 앞서 거론한 영화 속 ‘도서관 이용자’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터다. 직원들 그리고 딴짓하는 사람들. 혹은, 공적 지원을 받기 위해 지방정부와 정치인들을 포섭할 방안에 대한 궁리가 도서관 운영 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임무가 늘어날수록 타협과 책임과 변수 역시 필연적으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뉴욕 공립도서관의 분점들을 비롯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제시되는 뉴욕 시내의 풍경은 어쩌면 도서관이 언제나 사회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려는 제스처가 아닐까?) 공공성의 다양한 의미와 성질을 함께 엮는 과감한 방식으로, 프레드릭 와이즈먼은 공공성의 역설에 따른 동시대 도서관의 복합적인 생리를 영화로 펼쳐 보인 것이다. 다만 이런 복합적인 생리가 와이즈먼에게 해결해 마땅한 문제가 아니라 기꺼이 긍정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물론 영화의 초점은 ‘교양’에 거의 맞춰져 있지만, 수십 년 간 영화 작가로서 특정한 장소의 역할과 그것이 수행되는 과정 사이의 이음새를 세밀하게 관찰해온 와이즈먼은 공공성의 다른 성질과 의미에 엮이는 ‘도서관 이용자’들의 몸짓을 조금의 냉소도 없이 포착한다. 그런 몸짓들 없이는 (공간을 넘어선) 공공장소로서의 도서관이 온전히 성립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몸짓들을 포괄하고 염두에 두는 것이야말로 공공 장소/기관이 된(혹은 되려 하는) 도서관에 어울리는 태도라는 듯이. 그러니 적어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서 묘사되는 뉴욕 공립도서관을 조화롭고 평등한 교육의 현장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된다. 다시 한 번, ‘도서관은 사회에 필수적인 공공 장소/기관의 위상을 갖는다.’ 와이즈먼이 이 영화를 두고 민주주의를 거론한 진정한 의중은 아마 이것이리라.
······글의 말미에 이르니 문득 이런 물음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과연 한국에서는 이런 도서관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단지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넘어 필수적인 공공 장소/기관으로 우뚝 서는 도서관 말이다. 아니, 그 이전에 한국이 그런 도서관이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일까? 나는 몹시 궁금하다.
윤아랑_작가
작가. 2020년부터 ‘공식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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