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기억은 매일 지워진다. 요즘은 스마트 기기가 발달해 자신의 모든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다지만 대체로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먼 과거의 일은 일기나 사진이 아니면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발휘하는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잊히기를, 너무 많은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지 능력도 같이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런 이별이 매번 두렵고 슬프게 느껴진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미처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평소 좀 더 자주 보고 기억에 남는 추억들을 만들어 둘 걸······’ 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희미한 추억에라도 매달리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100세의 할아버지는 기억이 지워지는 병을 앓고 있다. 할아버지의 손자인 아이는 그런 할아버지가 낯설게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늘 지켜보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와 함께였다.
할아버지는 늘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았는데······. 날마다 학교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태권도 시합 때면 응원하러 오고, 수두에 걸렸을 때는 병원에 와 위로도 해줬다.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를 위해 뭘 했더라?
아이는 할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할아버지의 시간이 지워진다면 아이는 할아버지와 무엇을 하며 보낼까? 이것은 아이의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기억의 되새김
우리가 과거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자주 그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ㅇㅇㅇㅇ했었지?", "맞아. ㅇㅇㅇㅇ해서 너무 좋았어." 이렇게 회복된 기억은 유효기간이 늘어난다. 그 유효기간이 끝날 때쯤 다시 그 일을 복기하면 소중한 기억의 생명력은 계속 유지된다. 사진과 영상이 있다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지워진다"는 글자가 여러 차례 반복되며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자 바로 옆 페이지에서는 선으로 그려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완성되어 간다. 마지막에 할아버지의 기억이 지워지자 오히려 할아버지 얼굴은 또렷하게 남는다. 아이가 할아버지와 어떤 교감을 나누었는지 책을 따라가보자.
오늘따라 할아버지는 밝은 얼굴로 아이를 맞이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이를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생 ‘프로스퍼’로 착각한다. 아이는 순간 “이제 난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혼란스럽다.
으음, 할아버지 동생이 되는 거야!
아이는 할아버지의 착각을 바로잡기보다 그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한다.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의 낯선 모습에도 아이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해가 떴는데도 잠옷 차림으로 조용히 누워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 힘찬 발걸음으로 뜰로 나가자 뒤를 따라간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동생이 되어 할아버지와 함께 카우보이 놀이를 한다. 공원 오솔길은 인디언들의 땅이 되고 아이와 할아버지는 비둘기 깃털을 사람들의 머리에 꽂아주며 무사히 인디언들의 땅을 건널 수 있게 도와준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벤치 뒤에 숨어 카우보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며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간다. 어느새 할아버지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즐기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이 혼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까? 아이는 이 순간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시간을 보낸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많지 않기에 함께 추억을 쌓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아이는 안다.
추억을 모으는 건 도토리나 반짝이는 조약돌이나
스티커를 모으는 거랑 다르다.
아이는 할아버지와의 놀이를 통해 역사도 알아간다. 아이는 인디언들이 공격받는 게 싫었기 때문에 인디언 추장이 놀이하고 있는 땅을 지나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디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인디언 놀이를 했던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마법이 있으니까.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지 못하는 마법.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는다는 걸 할아버지가 알려 주었다.
할아버지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아이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짧은 시간 함께한 추억은 할아버지를 오래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소통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사랑이라는 이음줄은 더 단단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다는 가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유지되기 힘들다. 평소 자주 소통하지 않는 가족들은 어느 순간 한꺼번에 감정을 터트리기 쉽다. 내 감정이 우선이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질 여유도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평소 대화로 조금씩 서로의 사정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가족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면 ‘나는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가 그동안 받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돌아보며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자각하고 함께 추억을 쌓은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알기 위한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가족들과 함께 그림책을 보며 어린 시절 추억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사랑이라는 마법은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도 지워지지 않게 해준다. 언제나 마음속에 함께하니까. 아이는 할아버지의 이 말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얘야, 난 네 할아버지여서 정말 행복하구나.”
허유진_숭례문학당 강사
현재 숭례문학당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그림책과 어린이 글쓰기 관련한 다양한 강연과 모임의 리더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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