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알토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연고 없는 이국땅에서 생활한다는 게 녹록지 않은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 수시로 불쑥불쑥 밀려드는 외로움과 헛헛함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 사회적인 활동 공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외딴 섬에 갇힌 듯한 소외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나는 마치 한국에서 28년 동안 살면서 하나하나 획득했던 생활의 무기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처럼 두려움이 많아졌다.
만약 나에게 ‘핀란드’라는 새로운 게임 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전, 이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규칙이나 유용한 지식을 알려주는 공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핀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좀 더 쉽게 연습 게임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분명, 조금은 더 겁 없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Itäkeskus Library)을 취재하는 동안 이곳이 바로 헬싱키의 이민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핀란드는 핀족이 대부분인, 한국과 비슷한 단일민족국가다. 이웃 나라 스웨덴과 덴마크에 비해 외국인 이민자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 수도인 헬싱키를 국제적인 도시라고 하지만, 이민자들은 헬싱키에서도 동쪽 지역에만 몰려 살고 있다. 이따께스꾸스 지역을 헬싱키의 다른 지역에 비해 치안이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종종 들었기 때문에 살짝 긴장한 채로 도서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나의 긴장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밀의 정원 같은 공간 속, 환한 풍경의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 풍경 ©정서원
다양성 속 안전함을 제1의 원칙으로
취재를 위해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의 사서 몰라리 안끼(Mölläri Ankki)를 만났다. 안끼는 이따께스꾸스도서관만의 차별화된 가치로 ‘다양성 속 안전함’을 꼽았다. 이용자들의 물리적, 정신적 ‘안전함’(safe space)은 핀란드의 모든 도서관이 도서관법에 따라 공유하는 기본 가치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은 여기에 이용자들의 문화적, 언어적 다양성을 고려한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핀란드어 서적이 아니라 아랍어와 쿠르드어, 러시아어, 소말리아어로 된 책을 배치했다. 원래 외국어 서적은 서가 주변부에 꽂아두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따께스꾸스도서관에서는 이용자들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배치함으로써 외국인이 좀 더 쉽게 자신의 언어로 된 책을 찾고 그 공간에서 환영받는 느낌을 받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외국인 주 이용자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들이 상시로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본인 스스로가 핀란드 사회에 이민자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민자로서 느끼는 어려움이나 필요한 도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안끼는 직원들에게 도서관 운영에 대해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고 한다. 올해부터는 직원들이 각자 어떤 언어를 할 수 있는지를 배지에 적어서 몸에 달고 있기로 했단다. 어떤 직원이 어떤 언어를 할 줄 아는지 도서관 이용자들이 힘들여 추측하지 않고도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새로운 환경에 낯설어할 수 있는 이용자들의 불편함을 덜어주려는 도서관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였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 메인 서가에 놓여 있는 외국어 책들 ©정서원
핀란드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무기를 빌려주는 기지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은 핀란드 사회에 익숙하지 못한 이민자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무기들을 빌려주고, 그 무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려주는 일종의 기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클래스에서는 이민자들의 비자와 여권 발급, 또는 다른 나라에 있는 가족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와 같은 법률문제부터, 핀란드의 전자 문서 서비스를 사용하는 방법 등 사소한 일상사까지 해결해준다. 공공도서관의 사진 스튜디오를 예약하는 방법과 세금 관련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안내해준다.
또 상시로 이용 가능한 언어 카페에서는 핀란드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지 약속을 잡고 이용할 수 있다. 특히 핀란드어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은 이민자 가정에서 이 서비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학생들을 위한 방과후 프로그램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 숙제를 집에서 봐주기 어려운 경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방과후 프로그램은 점점 확대되어 최근에는 성인 대상으로도 운영된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서비스 정보는 도서관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다. 서비스 제공이 마치 도서관의 주요 목적인 것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게시판마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낯설고 불안한 이민 생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들이 느낄 안도감이 나에게도 전해져왔다.
시민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도서관
최근 핀란드에서는 주민들이 지역개발 정책과 관련해 의견을 내고, 해당 안건에 일정 수 이상의 지역주민들이 동의하면 개발에 필요한 예산을 할당해주는 오마스터디(Omastudy) 시스템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약 3만 4천 명의 주민이 있는 바르띠오뀰라(Vartiokulä) 지구는 앞으로 약 10년간 헬싱키에서 가장 많은 개발이 이루어질 지역 중 하나다. 해당 지구에 속하는 이따께스꾸스는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을 아우를 수 있는 도심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따께스꾸스 지역처럼 앞으로 활발히 개발될 지역에서는 이 같은 시스템을 지역주민들이 잘 활용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도시를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안끼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지역에 사는 이민자들의 경우 이 제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언어 장벽 때문에 활발히 참여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따께스꾸스도서관에서는 주민들이 이런 제도를 잘 활용해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의 터전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안끼는 한 가지 예를 들어주었다. 아프리카계 지역주민들이 상인으로 많이 일하고 있는 지역의 오래된 쇼핑몰이 재개발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라 주민들의 걱정이 크다고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집값이나 월세가 더 올라서 기존 삶의 터전을 뺏길 수 있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은 이와 같은 우려를 정책 결정 기관에 전달하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다양한 문화를 핀란드에 소개해주는 공간
특별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이 이민자들의 문화를 더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소개하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이민자들이 자신의 문화를 기억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비교적 단일한 문화를 가진 핀란드인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지난 4년간 핀란드에 살면서 아주 인상 깊었던 점은 빈부 격차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도 한몫을 하겠지만, 핀란드인들은 대체로 소박한 삶을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름에는 가족이 다 같이 여름 별장에 가고 겨울에는 집 안을 꾸미면서 사는 일상이 놀랍도록 비슷해 보일 때가 많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사회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은 그 지역에 사는 핀란드인들에게 이민자의 문화를 소개하고 새로운 문화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 되기를 지향한다. 최근에는 이따께스꾸스 지역에 있는 가장 큰 아프리카 커뮤니티의 NGO와 협업해 아프리카 축제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다양한 이민자들의 축제를 도서관에서 소개할 수 있도록 기획하는 중이라고 한다. 해당 지역에 사는 핀란드인들이 노래나 음식과 같은 문화적인 이벤트를 통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웃 주민들을 이해하고 알아갔으면 하는 것이 도서관의 바람이다.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서관


헬싱키평생교육원에서 근무하는 이슬람과의 만남 ©정서원
안끼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혼자 도서관을 둘러보다 우연히 이슬람(Islam Al-Badri)을 만났다. 그는 개발자가 되려고 공부를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헬싱키평생교육원에서 일하고 있다. 이슬람은 거의 매주 이따께스꾸스도서관에 와서 이민자들의 비자 서류나 정착에 관련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자신도 이민자이기 때문에 다른 이민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잘 알고 있고, 그들이 핀란드에 더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 큰 의미를 느낀다고 했다.
“도서관이란 공간이 좀 더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핀란드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민자들은 핀란드의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아예 모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이 이민을 온 후 도움을 받을 장소를 도서관으로 정해놓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한다면 도서관 문턱이 낮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슬람의 말을 들으며 4년 전의 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약 이따께쓰꾸스도서관처럼 핀란드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훨씬 마음이 든든했을 게 분명하다.
이따께스꾸스도서관을 취재하며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공도서관은 정부가 운영하는 많은 공공기관 중 하나지만, 딱딱한 문서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책으로부터 문화로 이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새로운 방향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필자는 이따께스꾸스도서관에서, 도서관이 책을 읽고 빌려가는 도서관의 보편적인 기능을 넘어 해당 지역의 커뮤니티가 더 건강하게 활동하는 편안한 쉼터 같은 공간으로 기능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