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옆] 마음이 진정되고 의욕은 솟게 하는, 만화가에게 충전소가 되어 준 세 곳의 도서관
들개이빨_만화가
2023-04-2700:01
공부를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이었지만 도서관은 좋아했습니다. 온갖 장르의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광활한 서가, 나만의 동굴이 되어주었던 자유열람실의 칸막이 책상, 축 가라앉은 휴게실, 눅눅한 공기가 떠도는 구내식당. 그 모든 게 한데 뒤섞인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저에게는 낡고 꼬질꼬질하지만 더없이 따스한 애착 담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 폭 감싸여 있었던 덕분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럭저럭 안온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짝 집중을 해야 하거나 위기에 봉착했다 싶을 때면 늘 도서관을 찾습니다. 마음이 진정되고 의욕이 솟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체력과 항마력 충전소 같은 거죠. 어딜 가든 그 지역의 대표 도서관을 사전에 꼭 검색해봅니다. 그렇게 해서 멋진 도서관과 좋은 인연을 맺었죠. 그중 각별히 아끼는 세 곳을 뽑아봤습니다.
둘리도서관
만화가가 된 뒤부터 만화를 테마로 한 박물관이나 도서관은 자발적으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피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업무의 연장 혹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경쟁업체의 실적 발표회에 참석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 제가 드물게 즐거운 마음으로 찾는 만화 특화 공간이 있습니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둘리도서관입니다.
왜 둘리도서관은 자꾸 가고 싶을까.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 고길동입니다. 〈아기공룡 둘리〉와 관련된 어록 중, 고길동에 감정이입을 하면 어른이 된 거라는 말이 있죠. 제가 그렇게 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돼가네요. 그래서인지 쌍문동을 찾을 때면, 만화의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함께 늙어가는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는 기분이 듭니다. 둘째, 주변 환경입니다. 완만한 동산이 도서관을 새둥지처럼 감싸 안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포근한 기운이 감돕니다. 셋째, 만화책입니다. 도서관 정책 중 가장 야속하게 생각하는 것은?희망도서를 신청할 때 만화책은 받아주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둘리도서관의 서가에는 웹툰부터 그래픽 노블까지 다양한 만화책이 갖춰져 있죠. 꽁했던 마음이 조금 풀립니다.
도서관 마니아라면 의정부 지역을 검색하자마자 머리 위에 느낌표가 뾱 떠오를 것입니다. 제가 그랬듯이요. 의정부음악도서관, 의정부미술도서관, 의정부과학도서관. 처음 이 검색 결과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곳이었나, 의정부! 전문 도서관을 무려 세 개나 보유한 행정구역이라니! 부대찌개의 고장인 줄로만 알았던(물론 그 또한 충분히 아름답지만) 의정부가 신비로운 지식의 땅으로 보이는 순간이었죠. 그중 제가 즐겨 찾는 곳은 미술도서관입니다.
미술. 시각예술이라는 면에서 만화와 친척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술품에는 말풍선이 없다는 겁니다. 자극적인 대사와 요란한 효과음이 사라진 세상. 색과 선, 양감과질감으로 이루어진 고요하고 장엄한 세계. 너무 좋죠. 층간소음에 시달리다 숲속 전원주택으로 이사 간 기분이죠. 이런 이유로 저에게 미술관은 품위 있는 휴식과 기분 전환이 보장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한데,화가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 즉각 코웃음을 칩니다. 휴시익? 품위이? 놀고 있네! 그러고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신나게 웹툰을 보더군요. 거 참. 미워 죽겠는데 헤어질 순 없는 오랜 배우자 같은 관계. 자기 밥벌이란 누구에게나 그런 걸까요.
외관부터 수려한 게 척 봐도 미술 좀 하게 생긴 의정부미술도서관. 내부도 멋집니다. 넓은 공간에 다채로운 색상의 미술 서적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고, 사이사이에 책상과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 다양한 자세로 앉아 일과 독서와 공부에 몰두하는 사람들. 오래 전 어느 미국 드라마에서 보고 동경했던 대학교 캠퍼스 잔디밭의 지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저도 적당한 곳에 앉아 삽화집 몇 권을 훌훌 넘겨봅니다. 미적 감각이 +3 정도 상승한 기분을 만끽하며, 가장 사랑하는 곳 전시관으로 향합니다.
변화무쌍한 색감과 격렬한 붓 터치가 인상적인 작품들. 정면에서 바라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격하게 엉키고 겹쳐진 채 굳어버린 유화물감의 울퉁불퉁함이 눈에 들어옵니다. 회화작품을 감상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지 오래지만, 캔버스 위를 파도처럼 넘실대는 물감의 요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작가와 같은 시공간에 함께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아름다움의 마법이란 대단한 것임을, 이 도서관에 올 때마다 실감합니다.
양구교육도서관
강원지역 도서관 중 가장 즐겨 이용하는 양구교육도서관. 저에게는 최적의 작업 공간입니다. 일단 컴퓨터를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1인당 하루 최대 180분만을 허용하는 수도권 도서관에 비하면, 이곳 컴퓨터실은 인심 좋은 국밥집입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시간을 아주 넉넉하게 퍼줍니다. 언제 찾아가도 앉을 자리가 있는 자유열람실과,대중소설부터 인문과학 및 예술 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이 제법 고르게 갖춰진 자료실도 좋고요. 일하다 지치면 인근의 개천 길을 따라 산책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죠. 인구과밀지역에서는 좀처럼 누리기 힘든 쾌적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조용한 자료실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입구 쪽이 시끌시끌합니다. 소리의 주인공은 60대로 추정되는 여성 대여섯 명이었습니다. 도서관 첫 방문인 듯, 곳곳을 신기하게 살펴보고 진열된 신간을 후루룩 펼쳐보며 두런두런 감상을 주고받습니다. 이곳에서는 처음 겪는 소음과 인구밀도에 놀라 한참 동안 그분들을 바라봤습니다. 낯선 문화공간에 왔다는 흥분에 취해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는 사람들. 일에 집중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다 짐을 챙겨 일어나는 순간,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 책 보니까 좋다. 도서관 너무 좋아.”
지금도 종종 이 말을 생각합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묵직이 담긴 기쁨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말씀하신 분은 책을 마음껏 접하지 못하고 살다가 도서관에 와서 그 결핍의 일부가 해소된 느낌을 받고 진심으로 감격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도 덩달아 감격했습니다. 설령 다소 소란스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을 비롯해 꿈을 못다 이룬 독서인들이, 문명사회가 이룩한 가장 너그럽고 아름다운 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자주 와서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었으면 좋겠다는, 저답지 않게 제법 기특한 생각을 했습니다.
해리포터가 갑자기 나타가 마법을 쓸 것 같은 앤트워프대학(Universiteit Antwerpen) 도서관 건물은 천주교 예수회가 1575년에 세운 중등교육 학교 건물에서 기원한다. 1902년부터는 예수회에서 세운 세인트 이나시우스 경상대학으로 쓰였고, 2003년 여러 대학들이 ‘앤트워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면서 현재의 건물에 도서관이 들어서게 되었
파리 중심에 위치한 샤틀레레 알 역(Gare de ChâteletLes Halles)은 다섯 개의 지하철 노선과 세 개의 RER 노선, 총 여덟 개 노선이 지나는 거대한 철도역이다. 낡고 복잡한 구조, 그리고 늘 붐비는 인파 속을 지나 환승할 때면 나는 종종 서울의 신도림역을 떠올린다. 물론 두 공간 사이에는 분위기부터 냄새, 온도까지 모든 것이 다르
[도서관 옆]은 각 지역의 여러 도서관을 도서관 안에서가 아니라 도서관 옆으로부터 시작해 여행하듯 탐방하는 코너이다. 입장료 5원의 신세계로부터기억 속 최초의 도서관은 대구 중심가에 있던 시립도서관이다. 붉은 벽돌로 육중하게 지어진, 일제 강점기의 양관이었던 그 도서관이 애초 어떤 용도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듣기로는 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