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고 담백한 그 대답이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잠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생활 면면에도 적용하고 있다. 최근엔 글을 쓰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그날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도 과감히 일어난다. 예전처럼 제자리에서 끙끙 앓으며 애꿎은 모니터를 노려보지 않는다.
똑바로 쓰지도 못할 거면서 삐대고 있는 나랑 함께 있기 싫다. 소설의 신이 보기에도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멋도 매력도 없어서 어울려주기 싫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놀아버린다. 온갖 딴짓을 하면서.
요즘엔 목욕탕에 자주 간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식 목욕탕은 아니고, 내가 다니는 스포츠센터에 딸린 목욕 시설이다. 공간이 꽤 넓은 데다가 사우나, 온탕, 냉탕도 갖춰서 제법 목욕탕 느낌이 난다.
자주 쓰는 비누. 포근한 딸기 우유 냄새가 난다. 잔향은 거의 없다. ⓒ신민
가볍게 운동하고, 샤워하고, 온탕에 들어간다. 더운 계절에 온탕은 39도에서 40도 사이를 넘나든다. 발끝을 담그자마자 눈사람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을 즐긴다. 이때는 되도록 소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곧바로 메모할 수도 없을뿐더러 몸이 이완되면 사고도 물렁하기 마련이니까.
대신 사람들을 구경한다. 여러 종목을 다루는 스포츠센터 회원들이 쓰는 곳이라 연령대도 다양하다. 아쿠아로빅 수업이 있는 시간대엔 거의 중장년층이다. 그녀들의 시시콜콜한 수다를 엿듣는다. 애호박을 볶을 때 소금 대신 새우젓을 넣어서 시원한 맛을 내는 법이라든가, 결혼 후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 47킬로그램을 유지하는 요령 같은 것들. 목욕탕의 건축재는 소리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소리는 벽, 바닥, 높은 천장에 여러 차례 부딪히고 튀면서 웅웅거리는 잔향을 남긴다. 집중해서 들어도 가까이 있지 않은 이상 몇몇 소리는 유실된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아저씨랑 ……했기 때문에 잘 지내는 거야. ……을 고쳐놨더니 이번에는 ……가 고장이라는 거지. 수증기처럼 희미하게 나타나는 문장들. 꿈뻑꿈뻑 사라지는 단어들. 나는 따뜻한 물에 잠겨 가물가물 눈을 감으며 몽롱한 수다를 듣는다.
얼마 전에는 오래된 목욕탕에 갔다. 이용자들은 스포츠센터 사람들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고, 새된 소리로 떠들지도 않았다. 마치 한 폭의 풍경처럼 이 공간과 함께 고요히 늙어온 이들 같았다.
거기에서 삭발한 두 노인이 서로의 몸을 씻겨주는 걸 보았다. 푸릇한 민머리 둘. 팔과 손을 두른 갈색 반점들. 얼굴도 체형도 닮아 보였다. 그들은 목욕 의자를 나란히 두고 앉아 번갈아 서로의 몸에 거품을 묻히고 속속들이 문지르고 물을 끼얹었다. 대화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거나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련의 일들이 익숙한 듯했다.
히노키탕에서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홀로 상상해보았다. 연인? 자매? 친구? 그 일은 끝내주게 재밌었고 이걸로 뭘 쓸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이 서자 더 즐거워졌다.
사방이 물이고 사람들은 모두 나체인 곳. 무엇을 보았든 느꼈든 상상했든 당장 옮겨 적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목욕탕에서 나는 쓰기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로소 자유롭다.
목욕탕에 갈 수 없거나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날에는 어떤 딴짓을 할까?
ⓒ신민
음악을 듣는다. 집에서는 마샬 스탠모어를 쓰고 있다. 이웃들이 외출한 낮에는 대범하게 볼륨을 키운다. 이 스피커는 베이스를 조절할 수 있어서 좋다. 쿵쿵 울려대는 사운드를 들으면 음악이 헐떡이는 것 같다.
ⓒ신민
대형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바에도 자주 간다. 아무런 기대 없이 들어섰다가 익숙한 곡을 만나면 짜릿하다. 맥주를 한 모금 두 모금 꼴딱 삼키면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귀를 때리도록 둔다. 그대로 천천히 멍해진다. 음악과 음악 사이, 일행과의 귓속말도 즐긴다. 그런 곳에 동행한 이상 진득한 대화는 포기한 참일 테니 잠깐의 정적을 달게 쓸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곡을 찾아 듣는 걸 좋아했고, 지금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음악적 지식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하는 수준이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없다. 10년도 넘게 듣고 있는 노래가 어떤 장르인지도 모른다. 관심 없다.
ⓒ신민
나는 그냥 어떤 소리들이 쿵쿵거리고 짝짝거리고 징징대고 흐느적대고 질질 흐르고 나긋나긋 날아가고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점점 웅크리는 것을 듣는 게 좋다. 가사가 슬프면 좋고 애틋하면 더 좋다. 다른 모든 감각의 스위치를 끄고 귀만 열어두면, 음악들은 각각 하나의 심장이 되어 엄청나게 뛰어댄다.
음악에 대한 철저한 무지가 내가 계속 음악을 좋아할 수 있도록 한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욕심이 생기고 책임이 불어나기 마련이다. 대상과 멀찍이 떨어지면 그것과 직접 관계하지 않고도 향유가 가능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를 만져야만 아는 것들도 있겠지만, 때로 어떤 사랑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자신의 두 발을 잘라버림으로써 영원히 지킬 수 있다. 사귀지 않은 사람과는 헤어질 일이 없다.
스스로 뭘 어찌해볼 수 없는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즐기는 것뿐이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사람은 편안해진다. 거기에서는 아무런 의무가 없다. 한정된 자유가 주는 기쁨을 누리면 그만이다. 그냥 놀면 된다.
ⓒ신민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하는 모든 일이 딴짓이다. 딴짓은 조바심으로부터 나를 구한다. 딴짓의 효용은 잠시 글쓰기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글쓰기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 보거나 들을 뿐 받아 적을 수 없는 목욕탕, 안쪽의 사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음악들. 그것들과 실컷 놀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고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백하건대, 내 손은 생산적인 딴짓을 하기에 적합한 기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쓸데없이 길쭉하고 매끄럽지만, 그런 손에 보통 기대되곤 하는 섬세함 따위는 없다. 집중력이 좋지도 않은 까닭에 뜨개질이나 요리, 수공예처럼 깊은 몰입을 요구하는 취미도 가질 수 없다. 나는 나를 쉽게 투박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내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촉을 세우고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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