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차를 타고 가던 도서관 사서 분의 물음에 나는 “어디?” 하고 물었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중천철학도서관’이라는 글귀와 함께 밝은 햇살 아래 나직하게 서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생긴 곳인데요, 아직 못 가봐서요. 어떤가 궁금하네요. 선생님이 가보시고 얘기해주실래요?”
중천? 철학? 도서관 이름이 몹시 특이해서,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안 그래도 집 주변에 원주 연세대학교 도서관밖에 없어 책을 찾아보기가 조금 불편하던 터라, 이튿날 가방을 챙겨 ‘중천철학도서관’으로 가보았다. 고맙게도 입구에 내가 궁금해하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원주에서 나고 자라 우리나라 동양철학을 일구신 중천 김충렬 선생님을 기려 도서관이 세워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중천 선생님에 대한 기록물이 은은한 불빛 아래 전시되어 있었다. 그냥 기록관일 뿐 중천 선생님이 그곳에 계신 것도 아닌데, 나는 선생님의 사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음속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고 인사했다. 이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분들이 다양하게 힘을 보태셨을 것을 생각하니, 얼굴도 뵌 적 없는 그분들께도 너무나 고마웠다.
입구를 지나 서가로 가니, 아직 책들이 많지 않아 서가 곳곳에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방을 보듯, 나는 왠지 도서관의 탄생기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아 무심코 웃음이 떠올랐다. 오히려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어 책들의 무게가 한 권 한 권 새롭게 전해져오기도 했다. 나는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면서, 점점 이 도서관에 빠져들었다. 도서관 마니아들은 익히 알겠지만, 종수는 적어도 인상 깊은 책들이 곳곳에 꽂혀 있으면 그 발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빅 히스토리 관련 책들을 비롯해 당시의 인문학 흐름을 알려주는 책들이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선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이.
중천철학도서관에서 ⓒ전제인
그 뒤로 집필이나 강의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찾을 때면 망설임 없이 중천철학도서관으로 향한다. 자료가 많지 않은데도 이 작은 도서관에서는 큰 도서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소한 기쁨들이 있다. 우선 도서관도 크지 않고 사람 수도 많지 않아서, 눈도 귀도 생각도 번잡하지가 않다. 책이 어디 꽂혀 있는지 헤맬 일도 없고, 꽂혀 있는 책들 속에서 공연히 길을 잃을 일도 많지 않다. 서가 규모가 큰 도서관의 경우, 필요한 책들만큼이나 내가 원치 않는 책들도 많이 꽂혀 있어서, 나처럼 방만한 호기심에 자주 흔들리는 사람으로서는 중천의 작은 서가가 오히려 도서관에서의 방탕한(!) ‘지적 방랑’을 막아주는 셈이다. 오히려 관련 분야의 종수가 적다 보니,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이 분야에서 파생된 다른 책들이 있을까? 왜 이 주제의 책들만 여기 꽂혀 있는 것일까?’ 하고 새롭게 자료를 찾아보며 새 길이 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큰 기쁨은 사서 선생님의 친절한 도움이다.
“선생님, 혹시 기후위기에 관해 추천해주실 책 없으세요?”
“중앙아시아 문화사에 관한 책을 찾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잠깐만요, 찾아볼게요” 하고는, 똘똘한 책들을 골라주신다. 기후에 관한 기초적인 개념과 지식을 담은 기본서와, 실천들을 담은 책까지 알차기 그지없는 책들이다. 중앙아시아 문화사도 근래의 연구나 출간 경향을 알 수 있는 책들을 찾아주신다.
나는 선생님이 골라주신 책들을 쭈욱 훑어보고는 우선 목차에서 읽고 싶은 부분부터 골라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 내가 모르는 다른 부문과 연관된 내용이 나오면, 그 챕터가 끝나기가 무섭게(또는 챕터를 다 읽지도 않고) 관련 분야 책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벌써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도서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권 중의 하나라고나 할까.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읽던 책을 팽개치고(맙소사!) 서가에 있는 다른 책들을 빼서 찾아볼 수 있다.
‘아휴, 시간도 많지 않은데, 읽던 책이나 마저 읽지, 뭘 또.’
나는 속으로 타박하면서도 눈과 다리는 저절로 서가로 향하는데, 이 앙증맞은 일탈의 기쁨 또한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서가의 책들 속에서 방황하다 보면, 스스로 타박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관련 분야와 아무 상관없는 책까지 슬슬 꺼내 보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위선에 찬 타박이었던 셈이다. 책상도 넓으니, 사람이 적을 때는 아주 책상 한 가득 늘어놓고 보기도 한다. 마치 그 책들과 책상이 나의 지적 영토임을 확인하고 만끽하듯이.
잠이 부실하거나 식곤증으로 노곤해질 때면, 그 넓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기도 한다. 물론 다소의 창피함과 민망함, 이마에 붉게 찍힐 얼굴 도장의 후유증을 무릅쓰고. 큰 도서관이라면 사람도 많아서 엎어져 자는 심정이 편치 않을 텐데, 작고 조용한 도서관이다 보니 마음이 그렇게까지 불편하지가 않다. 이 도서관을 무시하거나 만만하게 봐서가 아니라, 그만큼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코를 곤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잠이 깨면 맨 먼저 앞에 앉은 분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어쨌든 나쁜 표정을 지은 분은 없었으니, 스스로 그런가 보다 한다. 물론 인사는 못 했어도 도서관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분들이니, 그런 잠쯤은 넉넉히 이해해주시는 분들이라 그랬을 수도 있으리라.
중천철학도서관에서 ⓒ전제인
가끔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큰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어쩐지 특별한 느낌이 든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마주친 것 같달까. 짧은 인사를 나누는데도 크나큰 반가움과 함께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흐른다. 특히 강의 때 만난 어린이나 청소년 독서캠프에서 만난 육민관중학교 친구들과 마주칠 때면 나는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게 고작이지만, 반가운 마음은 그렇게 짤막하지가 않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집에 가서도 마주친 얼굴들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바보. 아까 이렇게 물어보면서 인사할걸. 너무 반가웠는데.’
하고 후회하면서.
중천철학도서관에서 누리는 이 모든 즐거움은 도서관을 지키고 계신 분들의 노고 덕분이다. 도서관을 깨끗이 청소해주시는 분에서부터 서가를 정리해주시고 책을 빌려주시고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친절하게 도와주시는 도서관 분들 덕분에 나는 강의나 출판 관련 일 때문에 중천철학도서관에 가지 못하는 날들에도 이따금 도서관을 떠올리며 행복해하곤 한다.
그 도서관분들 가운데 유희경 관장님을 빼놓을 수 없다. 관장님은 ‘도서관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신념으로 중천철학도서관을 운영해오셨다. 프로그램 하나에도 정성을 쏟고 시민들의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이시는 관장님을 보면서 ‘원주에 계셔서 너무 좋다’ 하고 행복해하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런 관장님이 이제 중천철학도서관을 떠나신다니, 벌써 마음이 헛헛해진다. 더구나 책에 밝고 지혜로운 사서 선생님도 9월을 마지막으로 중천철학도서관을 떠나신다니, 꼭 도서관이 텅 빈 것처럼 쓸쓸해진다.
이제 중천철학도서관은 또 다른 분들이 지키게 되겠지만, 이 도서관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려면 무엇보다 시민들이 나서서 도서관을 아끼고 우리 동네 문화원으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책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 근대 도서관의 역사가, 중천 선생님의 정신 위에 세워진 중천철학도서관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더욱 견고하게 발전해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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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메신저는 책과 언어 그리고 독서를 매개로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모색하는 크리에이터를 만나는 인터뷰 코너이다.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 그리고 번역가로 활동하는 김목인을 만나 노래하고, 읽고, 쓰는 일상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책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통해 책과 독서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Q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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