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
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10월호에 싣는다.
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난여름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에서 세찬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다. 드르니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전망대에 이를 즈음 빗발은 더욱 거세졌다. 돌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피해가지 않기로 했다. 순담 매표소에 도착했을 때, 소나기는 그쳤지만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소나기 맞으며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때 읽은 소설 <소나기>의 기억 때문이었다. 징검다리, 무밭, 들꽃, 수숫단, 대추 그리고 소설의 서사와 배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잊고 살았던 첫사랑도 빗발 속에 아련히 클로즈업되었다.
매표소를 나와 가까운 카페 프로방스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젖은 옷을 말린다. 그래, 소년과 소녀는 수숫단 속에서 소나기를 피했지. 소녀가 비좁은 수숫단 속으로 들어오라 했지만 소년은 뒷걸음쳤지. 사랑은 그렇게 떨림으로 시작하지. 그때 <소나기>를 읽던 소년은 지금 할아버지가 되어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장면, 대사, 마음의 움직임, 숨소리까지 그대로 기억 깊은 곳에 남아 있었구나. 소년의 떨리는 가슴을 생각하며 비 갠 창밖을 내다본다. 우연히 만난 소나기는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하였고 60년 전 소년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추억여행을 하게 했다. 소설 <소나기>의 힘은 그만큼 컸다.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순수한 사랑을 창작하다
전쟁이 치열한 힘들고 어렵던 시절 국민 단편소설 <소나기>는 세상에 태어났다. 황순원 선생이 이 작품을 창작한 것은 1952년 10월이었고 발표된 것은 1953년 5월이다. 선생의 나이 39세 때다.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왜 이 단편소설이 누구나 기억하는 국민소설로 자리잡게 되었을까? 1960년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에 빠짐없이 수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을 재현한 문학 테마파크가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다. 대부분의 문학관이 연고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나기마을은 왜 양평에 있을까?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작품 배경이 양평이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이 해질 무렵 덕쇠 할아버지 호두밭에서 조심스럽게 딴 호두알, 그 사랑을 전할 기회를 보고 있던 소년이 마을 사람들에게서 소녀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소년은 호두알을 전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양평이 갖는 의미는 크다.
서종 IC에서 빠져나와 북한강 변을 따라 한참 가면 중미산로가 나온다. 여기서 수능계곡 개울을 끼고 가면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라 쓰인 표지석이 나타난다. 약간의 언덕을 오르면 수숫단을 형상화하여 디자인한 황순원문학관 건물이 반긴다.
문학관 중앙로비에 작가 연대기가 먼저 내방객을 맞는다. 선생의 삶의 자세와 문학의 태도를 살필 수 있다. 어록도 유리판에 새겨 걸었다. 눈에 띄는 것은 ‘문자구도지기(文者求道之器)’이다. 선생의 도는 무엇이었을까? 일관된 선생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일 것이다. 선생께서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를 신조로 창작에 몰두하셨고 제자를 그렇게 가르치셨다. 소설가 오유권은 선생의 고희 기념 작품집 《말과 삶과 자유》(문학과지성사, 1985)에서 선생을 회고한 적이 있다.
‘작품 외에는 어떤 장소,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이름 한 번, 얼굴 한쪽 내밀기를 사양하시는 점입니다. 이는 저명인사로서 피하기가 어렵고 지키기가 힘든 일인데 선생님께서는 잡문에 손을 안 대시는 것은 물론,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시지 않고 텔레비전에도 얼굴 한 번 비치신 일이 없습니다.’
문학관 제1전시실로 들어선다. 사진 속 선생께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선생의 인품처럼 따뜻하다. 작가와의 만남이란 타이틀을 단 이 전시실에서는 선생의 생활 유품과 친필 원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함축성과 완결성의 미학, 겨레의 작가,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그를 따라 문학의 길을 걷는 사람들, 후학들에 미친 문학적 영향 등 핵심 주제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된 패널 설명이 선생의 삶과 문학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2전시실은 선생의 대표작을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소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어 ‘디지털 소나기 산책길’로 명명한 실감 콘텐츠 영상 체험관으로 이어진다. 소나기의 주요 장면을 뉴미디어 아트로 재창조한 작품을 전시하고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빠져들면서 소설 장면들을 연상하게 된다. 영상 체험관을 나오면 ‘공부 안 해도 되는 문학교실’이 있다. 여러 체험을 통하여 얻은 영감을 표현해보는 곳이다.
문학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소나기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과 주변 산책로에 소설의 공간 배경을 재현하여 소설에서의 느낌을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나는 징검다리, 소녀를 등에 업고 건너던 물이 불어 있는 도랑, 꽃을 꺾으며 가까워지는 들꽃길, 송아지를 타며 놀던 송아지 들판, 소녀가 건넨 대추, 소년이 따던 호두를 딸 수 있는 고백의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사랑, 이어지다
소나기마을은 선생의 문학 유산을 대중과 호흡하는 살아 있는 작품으로 현재화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자부심일 수도 있다. 매년 가을 개최되는 황순원문학제는 황순원문학상 시상, 문학 세미나, 문화 공연,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디카시 공모전 등 다양한 부대 행사를 통하여 선생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한편 생활 속의 문학으로 확산해가고 있다.
황순원문학촌이 우리나라 대표 문학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황순원과 <소나기>가 갖고 있는 대표성, 둘째는 문학관의 근접성, 셋째는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이다. 그만큼 선생을 중심축으로 세 요소가 결합하여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소나기마을에서는 ‘9인의 소나기 이어쓰기’를 부제로 한 단편소설집 《소년, 소녀를 만나다》(문학과지성사)를 간행했다. 2015년은 황순원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스승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을 기획했다. 이어쓰기에는 선생에게 문학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서 문학을 익힌 제자들이 참여했다. 이 책은 2016년 청소년 교양도서, 책따세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2024년 13쇄를 발행하였으니 그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은 김종회 촌장이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 황재국 교수가 썼다. 눈을 감는다. 국민소설 <소나기>를 우리들에게 선물해주신 선생께 감사의 묵념을 올린다. 선생이 작품을 쓰신 것도 사랑이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도 사랑이다.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이 작품을 오마주하는 것도 사랑이다. 힘을 모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것도 사랑이다. 많은 관람객이 소나기마을을 찾는 것도 사랑 때문이다. 문학촌은 사랑이 모이는 곳이다. 그만큼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다. 문학의 힘은 큰 것이다.
문학관 주변 맛집 사각하늘
소나기마을을 나와 찾은 곳은 27년 전 산 좋고 물이 좋아 우연히 이곳에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는 ‘사각하늘’이다. 앞으로 북한강이 흐르는 매곡산(509m)의 아늑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중정(中庭)을 통하여 올려다보이는 하늘 모양이 사각형이라 상호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 음식점의 대표 메뉴는 스키야끼다. 간장과 설탕을 베이스로 만든 다레(일본식 양념장)에 얇게 썬 소고기와 대파, 두부, 배추, 실곤약 등을 넣고 자작하게 졸인다. 육수는 간장의 짭조름한 맛이 난다. 소스는 맛간장에 미리 풀어놓은 날달걀, 찍어 먹는 음식에 따라 그 재료의 식감에 소스의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풍미를 한층 높여준다. 음식 재료는 제철의 신선한 최상급으로만 요리하는 게 이 집 맛의 비결이라고 한다.
정갈한 김치, 생강을 곁들인 가지무침, 부추와 더덕채, 연근무침, 야채샐러드의 밑반찬이 깔리고, 주인장의 정성으로 익힌 소고기와 버섯 그리고 두부, 곤약을 소스에 찍어 먹는 맛이 오감을 자극한다. 아담한 고택에서 고즈넉한 분위기와 음식에 담긴 정성이 느껴지는 맛집으로 흠잡을 게 없는 것이 흠이다. 흘러나오는 클래식한 음악마저도……. 식사는 새우를 곁들인 한 그릇의 우동으로 마무리한다. 디저트로 나온 계피차가 입안을 달래준다.
‘사각하늘’이라는 멋진 상호가 탄생한 계기를 준 하늘이 보이는 중정을 비롯하여, 이 집의 설계와 건축에서부터 실내 디자인, 가구 하나하나의 실내 공간 배치에 이르기까지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적재적소에 배치된 아름다운 생화 화분, 주변의 조경까지도 주인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집은 단순히 한 끼의 음식만을 파는 식당이 아니다. 나만의 문화를 판다!”고 말하는 주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본에서 다도를 공부한 주인장은 사각하늘이 식사와 제대로 된 차를 풀코스로 경험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하면서 다도실을 갖추고 있는 별채를 구경시켜주었다.
앞마당에는 추울 때 피어나는 한벚꽃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깊어가는 이 가을, 스키야끼 한번 드시지요?”
이창경_신구도서관재단 이사, 수필가
신구도서관재단 이사, 한국출판학회 고문, 수필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91년 《추강 남효온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4년 《문예운동》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고전 편찬 일을 도왔고 1989년부터 신구대학교 미디어콘텐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 교육, 출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연구에 힘써왔다. (사)출판문화학회 회장, (사)한국출판학회 회장, (사)아시아민족조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 《함께 걷는 책의 숲》과 《세계의 식물원 산책 1》(공저)이 있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지역을 둘러싼 문학적·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부산에 소재한 추리문학관을 기행한 내용을 6월 호에 게재한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6월 바닷바람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자리 잡은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다. 마을 길로 들어서면 초입에 2층 붉은 흙벽돌집이 눈에 들어온다. 고향집에 들어선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이곳이 농민문학기념관이다. 바로 옆에 노천상리마을회관이 있어 더욱 정겹다. 작지만 큰 역할을 하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국내 유일의 농민문학 전문 문학관이다.
문학관 기행은 문학관이 배경으로 하는 문학인의 삶을 소개하고 문학관이 설립된 마을을 둘러싼 문학적 · 공동체적 가치를 전달하는 코너이다.문학관 기행 연재를 맡은 신구도서관재단 이창경 이사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하고 쓴 에세이를 5월호(첫 회)에 싣는다.문학가의 삶과 태도가 현대로 와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탄, 해